| 남전 산책을 즐기듯이 어느 날 남전이 밭에 나갔다가 한 승려가 거기에 있는 것을 보고는 깨진 기왓장을 던져 그를 때렸다. 승려가 고개를 돌려 돌아보자, 남전이 한쪽 다리를 치켜들었다. 승려가 아무 응답이 없었다. 남전이 절로 돌아가자 그 승려가 따라와 가르침을 청하며 물었다. <방금 전에 화상께서는 기왓장을 던져 저를 때렸습니다. 그것은 저를 깨우쳐주고자 하신 일이 아니겠습니까?> 남전이 말했다. <그러면 한쪽 다리를 치켜든 일은 어떠한가?> 승려가 대답이 없었다. 어떤 중이 남전에게 와서 두 손을 앞으로 포개고 섰다. 남전이 말했다. <너무 속인 티가 나는구나!> 중이 다시 합장을 하니 남전이 말했다. <너무 중티가 나는구나!> 라즈니시 강의 ** 선의 일화는 어린아이도 금방 알아채는가 하면 아주 나이 많은 사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수도 많다. 선의 일화는 그대가 아는 이 세상의 언어로 진행된다. 그러나 똑같은 말과 몸짓에도 전혀 다른 색채와 의미가 있다. .. 스승은 기왓장으로 제자를 때렸다. 제자는 돌아보고 스승은 한발을 들고 섰다. 남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반쯤 돌아서는 것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완전히 돌아서라. 세상에는 미지근한 태도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선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 우주 안으로 녹아드는 일은 세상이 다 두려워 하는 일이다. 강은 바다에 도달하는 찰라 멈추어 돌아본다. 아름다운 산들과 계곡, 지나온 길들, 이제 바다로 들어서면 더 이상 강의 존재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것과 달른 길도 다른 진리도 없다. 강의 운명은 바다로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까비르로 돌아가 보면 그는 바다로 들어가 사라지는 이슬 한방울을 노래했다. 그러나 그는 임종에 임하여 바다가 이슬방울 안으로 사라졌다고 노래했다. ** 다시 남전. 너무 속인티가 나는구나, 너무 중테가 나는 구나. 선은 삶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종교이다. 선은 돌로 만든 신상을 숭배하지 않는다. 선의 눈으로 볼 때 그런 것들은 모두 허구이다. 선은 이 삶을 사랑한다. 선은 철저하게 이 삶을 긍정한다. 선에 있어서 존재계는 이 삶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이 삶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대는 시간과 공간을 뒤에 남겨두고 초월의 세계로 들어간다. 선에는 신도 없고 기도도 없다. 기도할 데ㅐ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은 외적인 것에 관심이 없다. 선의 관심사는 철저하게 내면으로 향한다. 내부로부터 삶을 아는 순간 그대의 존재 전체가 춤이되고 지복이 된다. 이 존재계에 대한 감사가 된다. - 세끼소의 시 한 편 - 거센 돌풍이 몰아쳐도 꿈적하지 않는다. 야성과 고독, 예리함과 힘으로 넘쳐서 새의 깃털처럼 날아오른다. 나는 오직 정상에 오른 사람과 뜻을 같이 한다. 걷고, 앉고, 눕고...... 그는 모든 일을 산책을 즐기듯이 하는구나. ** 아름다운 시이다. 찬란한 의식의 정상에 도달한 사람의 상태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놀이이다. 그는 해가 뜨오르는 아침 나절 산책을 즐기듯이 삶을 누린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다. 그는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있다. 아무 목적도 없다. 다만 아침의 싱그러운 햇살과 시우너한 바람, 새들의 노랫소리, 활짝 핀 꽃들의 향기로 가득찬 공기 그 모든 것을 즐길 뿐이다. 그에게는 특별한 목적지도 없고 지향하는 목표도 없다. 그저 순수한 즐거움이 있을 뿐. ** 선에서는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이 소중하다. 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치고.. 아침, 저녁, 모든 것이 고요에 잠긴 밤. .. 선은 이 모든 것을 관찰하고 주시한다. 자기 안의 주시자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이 존재계 전체가 엄청난 경이이다. ** 사물은 거울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수많은 사물이 나타났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 그대는 텅빈 대나무 피리가 되고 우주가 그대를 통해 노래한다. ** 시는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 예술은 영원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을 넘어 영원 그 자체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