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전
날개를 잊었구나
남전이 황백에게 물었다. <定(사마디)과 慧(프라즈나)를 균등히 배우면 불성을 본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황벽이 대답했다. <항시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남전이 다시 물었다. <방금 말한 것이 진정 그대의 견해인지 의심스럽군.> 황벽이 말했다. <물론, 아니지요> 남전이 말했다. <물값은 제쳐 두고라도 짚신 값은 누구에게 돌려 줄 작정인가?> 이 물음에 황벽이 아무 대꾸도 못했다.
라즈니시 강의
** 이 일화는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몇 마디 말 속에는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붓다의 사마디는 프라즈나를 의미하고 프라즈나는 각성을 의미한다. 그대는 더욱 더 의식적이어야 한다. 사마디와 프라즈나는 정반대의 두 극단이다. 프라즈나는 그대의 존재에 대한 완벽한 각성이다. 라마크리슈나의 사마디는 완벽한 망각이다.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 두 경우 모두 궁극적인 경험으로서 지복과 영원, 진리, 아름다움, 신성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크리슈나의 경우는 무의식적이다. 그러나 붓다는 철저하게 의식적이다. 그의 모든 행동은 철저하게 주의깊은 각성의 상태를 보여준다.
라마크리슈나는 무의식적인 층으로 더 깊이 들어감으로서 마음을 통과했다. 붓다는 이런 식으로 무의식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모든 행동이 철저하게 의식적이고 우아하고 말 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사마디와 프라즈나나 둘 다 무심의 상태이다. 둘 다 마음 밖으로 벗어난 상태이다. 그러므로 경험은 동일하다. 그러나 길은 다르다. 붓다의 길은 빛의길이며 크리슈나의 길은 어둠의 길이다.
.. 항 시 아무것에도..
황벽의 대답은 사마디와 아무 간계도 없다. 프라즈나와도 무관하다. 그는 단지 스승이 아니라 학자에 불과했다. 이 질문은 학문이나 지성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 오직 직접적인 경험에서 답이 나온다. 황벽의 대답은 엉뚱하다.
..물값은 제쳐 두고라도 짚신 값은.. 남전은 높은 산중에 살아 물을 길어오기 위해서는 몇리를 걸어 집신을 떨어떠려야했다. ..그대는 짚신을 신을 자격도 없다. 그런 말이다. 그런 빌려온 지식으로 그대가 무엇을 하겠는가?
** 어떤 사람은 어둠의 길을 간다. 그는 무의식의 어둠속으로 깊이 들어가 마음의 밑바닥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무의식적인 것 또한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기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이 의식적으로 되면 그는 점프를 해서 뛰쳐 나온다. 붓다의 방법이 더 과학적이다. 어떤 방법이 옳고 그러느냐는 문제는 없다.
** 크리슈나의 경우는 천 개의 문중에 한 개만 진짜였다. 따라서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헤매고 다니는 것은 나의 길이 아니다. 나의 궁전에는 모든 문이 진짜다. 헤매고 다닐 필요가 없다. 천 개의 문이 있지만 그대는 어느문을 통과해도 밖으로 나올 수 있다.
** 그대가 비록 물 위를 걷는 법을 배워 실천할 수 있다고 해도, 그대가 물로 술을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그대가 전적으로 영적이 되지는 못한다.
이미 쓸데 없는 논쟁(사마디, 프라즈나)으로 수백년을 소모했다. 이제 더 이런 논쟁에 휘말리지 말라. 그대는 어느 길로도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 다만 붓다의 길이 밝은 길이다. 훤한 대낮에 갈 수 있는 길을 왜 캄캄한 어둠 속에 갈려고 하는가.
그대의 짚신은 누구것인가? 주인에게 짚신값을 돌려주라. 그대는 스승의 자격이 없다.
- 세끼소의 시 한편 -
진살한 사람 단 하나만 나타나도 세상의 모든 거짓이 사라진다. 그러니 조사의 길이 쇠퇴한다고 낙심하지 마라. 이제. 그대 지혜의 도끼는 날개를 달았으니, 그대 날아오를 날이 분명코 오리라.
** 계절이 바뀌고 기후가 변하듯이 사람들의 생왈양식도 바뀐다. 사람들의 관심사나 목표도 바뀐다. 그러므로 당분간 우리가 붓다의 길을 잃었다해도 염려하지 말라. 그날이 올 것이다. 항시 어두운 밤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그만큼 가깝다. 그대는 고대의 붓다들과 같이 하늘로 치솟아 오를 것이다. 내가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날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