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전
병 속의 새를 어떻게 꺼내겠는가
어느날, 육긍대부가 남전에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병 속에 오리 새끼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오리가 너무 커 버려서 병 주둥이로 나올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병을 깨기도 원치 않으며 오리를 죽이기도 원치 않습니다. 스님이라면 어떻게 병속의 새를 꺼내시겠습니까?> 그러자 남전이 느닷없이, <대부!> 하고 불렀다. 육긍이 엉겁결에, <예.> 하고 대답했다. 남전이 말했다. <오리가 나왔다!>
남전이 어느 마을을 방문했다. 그런데 마을에 도착해보니, 벌써 환영준비가 갖추어진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남전이 마을의 촌장에게 물었다. <어디로 여행할지 사전에 알리는 것은 내 관습이 아니거늘, 어떻게 내가 오늘 이 고을에 온다는 것을 알았소?> 촌장이 말했다. <어젯밤 꿈속에 토지신이 나타나 오늘 스님이 오실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남전이 말했다. <나의 수행이 보잘것없다 보니 귀신에게까지 들켜 버렸구나!>
라즈니시 강의
** 이상한 수수께끼이다. 논리적으로는 풀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병을 깨뜨리거나 오리를 죽여야할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비유이다. 병은 그대의 몸이고 오리는 그대의 주시하는 본체이다. 그대의 몸이 병이라면 그대의 의식은 오리이다. 그런데 어떻게 의식이 몸 안에 들어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의식이 몸 밖으로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의식은 거대한 우주이다. 모든 차원에 걸쳐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우주이다. 그에 반해 몸은 아주 작다. 조그만 병과 같다. 그런데 존재계는 어떻게 이런 일을 성사시켰을까. 물질적인 것 안에 비물질적인 것 안에 비물질적인 것 영적인 것이 들어가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대부는 선의 전통에 이어 내려오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문제이다.
육긍대부는 매우 높은 벼슬아치다. 남전은 일개 거지나 다름없다. 그런데 남전은 날카로운 고함소리로 소리쳐 대부하고 부른다. 육긍은 그 순간 모든 것을 잊었다. 오직 "예 스님."하고 답할 수 있었을 뿐이다.
대부는 자신의 의식을 보여주었다. 그 의식을 표현했다. 이 의식은 몸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 의식은 자유자재로 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몸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몸은 장애물이 아니다. 몸은 오직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만 장애물이 된다. 비물질적인 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몸은 그대 안에 영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 않으며 영적인 요소는 몸을 담고 있지 않다. 영적인 요소는 그저 거울일 뿐이다.
남전이 소리칠 순간 육긍대부는 깊이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깨어났다. 이와같ㅇㄴ 각성의 순간에 그대는 몸이 아니다. 그대는 몸안에 있지않다. 그대는 저 너머에 있다. 밖에 나와 있다. 오리가 나왔다. 여러선사들이 이 오리의 문제를 다루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남전이 최고다.
** 남전은 어느 마을을 방문했다...
세상은 넓다. 그런데 아무 것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세상은 아무것도 뚫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한 가슴을 지닌 삶들로 만원이다. 그들은 듣지만 이해하지 못한다. 설령 붓다가 면전에 나타난다 해도 그들은 알아보지 못한다.
붓다는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 간단한 이유는 그의 영향력이 마음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그대를 설득하는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 그는 나는 붓다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대 스스로 알아보기를 우너한다. 그렇게 붓다를 알아보는 것이 여행의 시작이다. 그런 까닭에 남전은 어디를 가든 그 고장 사람들이 자기의 방문을 사전에 알게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 비구름은 돌밭이든 벌판이든 비옥한 토양이든 가리지 않고 비를 뿌린다. 비구름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비구름은 눈이 멀었다. 비구름은 비를 가득 머금어 무겁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작정 짐을 덜려고 한다. 남전은 비를 뿌려주는 구름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눈먼 비구름처럼 아무데나 비를 뿌려주기를 원치 않았다.
** 남전은 매우 정직한 사람이다. 그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커다란 에고를 느낄것이다. 보라 귀신들까지 나를 알아본다. 그러나 남전은 오히려 반대다. 나의 방문을 귀신이 알다니. 이것은 나의 수행이 보잘것 없고 얄팍하다는 증거이다. 상상이 만들어낸 귀신을 통하여 그대는 꿈 속에서 나의 방문을 알아차렸다. 진정으로 영적이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꿈이나 비전을 통한 예언의 소리를 듣고 의기양양해져서 이렇게 선언할지도 모른다. 보라 신들마저 나를 알아본다. 그러나 남전은 반대다.
** 종교적인 사람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하다는 것이다. 그는 겸손하고 에고가 없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한다. 그는 칭찬의 소리를 듣고 의기양양하거나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영적인 경지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흔히 보는 종교인들은 조그만 일에도 자기의 에고를 만족시키려 한다.
** 선은 에고를 치장하는데 아무 관심도 없다. 오히려 선의 모든 노력은 어떻게 자기를 비우느냐 어떻게 자기를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다. 무가 되는 것은 더 없이 훌륭한 일이다. 오직 그 무로부터 수천 송이의 장미꽃이 피어난다. 선에서는 겸손함을 연마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깊은 명상의 결과이며 부산물일 뿐이다.
** 겸손한 자에게는 계속 문이 열린다. 하나의 문이 열리고 연달아 다른 문이 열린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지켜보는 자로 남는다. 그것이 궁극적인 단계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보면 우주 전체를 소우했다. 하지만 거기에 소유욕은 없다. 그는 본질적인 세계 삶과 죽음의 영우너한 신비로 들어간다.
** 남전은 대단한 이해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이것은 경전에 의한 이해도 아니고 학문적인 이해도 아니다. 그 이해는 명상을 통해 저절로 성정한 것이다. 그는 삼십년동안 끊임없이 명상했다. 서서히 사념이 떨어져 나갔다. 꿈이 사라졌다. 모든 먼지가 제거되었다. 꿈이 사라졌다. 모든 먼지가 제거되었다. 더할 나위 없이 투명한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삼십년동안 그는 산을 내려오지 않았다.
- 세끼소의 시 한편 -
당신은 구름의 사다리를 타고 산에 올랐다. 그리고 나는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경도를 벗어났다. 우리는 북쪽 하늘의 별들처럼 멀리 떠러져 있구나.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친구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한번의 기회인 것을.
** 세끼소는 말한다. 그대가 어느 시기에 깨닫든 어느 장소에서 깨닫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깨닫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대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붓다들과 동시대인이 된다. 의식의 최고 정점에 도달한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형제애와 같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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