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저 (雜著)
지족당 조공 유사 (知足堂趙公遺事)
공이 여덟 살 때에, 돌아가신 아버지 집의공의 동년에게 가서 배웠다. 그분은 위연산 아래 마을에 살았는데, 그때의 방백도 또한 집의공의 동년이었다. 그 방백이 그 전부터 공이 특이한 재사라는 소문을 듣고, 부임하자마자 한 번 찾아가고자 생각했다. 공이 그때 위연 마을에 있으므로 방백이 곧바로 위연 가로 가서 동년에게 공을 데리고 오라 하였다. 공의 용모는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고, 말하는 품은 여유가 있으면서도 우아하였다. 방백은 "과연 앞서 듣던 바와 같다."라고 하고, 이어서 네 운을 불렀다. 모두 그 자리에서 지었는데, '몇개 푸른 부들의 많은 마디'라는 구절이 있었다. 방백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서 손을 잡고 감탄하면서 "감찰이 비록 죽었으나 이 아이가 반드시 세상에 이름을 떨쳐 부모를 현양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옹대한 문필은 한 세상을 독보하여 생원, 진사 두 시험에 모두 장원했으나, 국법에 한 사람이 두 곳의 장원을 할 수 없었으므로, 생원시에는 일등, 진사시에는 이등으로 합격하였다.또 중시에 장원을 하였기 때문에 그가 살던 곳을 사람들이 삼장원동아라 불렀다.
공은 청백으로서 당시에서 으뜸이었는데, 같은 고을 출신의 승지 정성근도 또한 청백으로서 일컬어 졌다. 중국 사신 고용경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본국에 사신으로 왔을 때, 일을 힘써 간편하면서도 엄숙하게 처리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어떤 사람이 오랑캐 땅의 족제비털로 붓을 만들고 백금으로 붓대를 만들어서 드렸다. 공은 그 붓이 마음 먹은 대로 글씨가 씌어지는 것이 좋아 붓대는 뽑아 버리고 받았다. 나라 사람이 은근히 말하기를 "공은 결백하다고 자신을 높이지 마시오. 우리 나라에도 또한 조 아무개와 정 아무개가 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공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삿날을 당할 때마다 지극히 슬퍼하고 사모하였다. 하루 전날 저녁에 반드시 정당에다 영위를 베풀고 찬을 갖추어 신주를 받들어 내오면, 곧 엄숙한 얼굴로 공손하게 있다가 닭이 울면 제사하였다. 전날 저녁에 신주를 받들어 내옴이 비록 예법은 아니나, 그 살ㅇ함과 공경함이 함께 지극하여 신이 앞에 있는 듯이 하는 정성을 깊이 이루었으니, 조 청헌이 침실에다 화상을 걸어 둔 것도 자랑하기에는 부족하리라.
공은 평생 동안 옛사람의 글을 읽어서 세도를 부지하고 기강을 세우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선비들이 의지하며 소중하게 여겼다.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마땅히 효성을 다해야 하고 임금을 섬길 때에는 마땅히 충성을 다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가 조정에 서게 되자 권위에 굴복되지 않았고 권세에 유혹되지 않았다. 조촐하고 조심함으로써 자신을 지키고 바른 얼굴빛으로 곧게 간하니, 사람들은 "급 장유가 다시 살아왔다."고 여겼다. 연산이 동궁에 있을 적에 보덕으로서 아침저녁에 진강하였더니 연산이 이 일을 매우 힘들어 했는데, 연산이 즉위하자 살해되었다. 그가 형을 당할 때에 천둥 번개가 갑자기 치고 비바람이 크게 몰아치니, 사람들이 모두 "바른 사람의 죽음은 하늘이 안다."라고 하였다.